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 요리 (문단 편집) === 영국 요리와 육식 === [[파일:ravJj3m.jpg|width=500]] 영국 요리의 역사를 논할 때 육식, 특히 쇠고기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쇠고기]]를 가장 탐하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켈트족 선조들은 기원전부터 이미 영국 섬들에 [[소]] 사육 문화를 구축했으며, [[로마]]인들도 43년에 영국을 침략하면서 소 떼를 이끌고 왔다. 결국 로마의 농업은 스코틀랜드 남부 및 동부의 저지대에 자리잡았고, 켈트족의 소 사육 문화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북부 및 서부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 >쇠고기는 영국의 로마 병사들이 특히 선호하는 양식이었다. 그 수요가 증가하자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소를 위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로마인들이 영국에서 물러난 뒤에도 소는 자연스럽게 부의 상징으로 남았고, 육식은 영국인 식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 >[[유럽]]은 [[육식]]을 즐기는 대륙으로 알려져 있지만, 영국인들은 이웃한 육지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쇠고기를 소비했다. 쇠고기에 대한 그들의 탐식은 사냥, 동물 학살, 화려한 고기 만찬을 즐겼던 켈트족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전통은 봉건 시대의 귀족들을 거쳐 이후 지주 계급 사이에서 계속 이어졌다. [[제임스 1세]]는 사슴 사냥을 할 때 직접 그 목을 딴 다음 '관리들의 얼굴에 사슴 피를 바르고 나서 그 피를 닦는 것을 금했다. 사슴 사냥을 마친 뒤 상류층 숙녀와 여성들은 사슴 배를 가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하얗게 해준다는 믿음에 양손을 피로 씻는 것'이 관례였다.[* 지금도 영국에서 [[여우]] 사냥을 할 때는 첫 사냥감을 잡은 사람의 얼굴에 피를 살짝 묻히는 의식을 한다.] > >[[영국인]]의 의식에서 동물 도살의 신성한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퇴색되었지만, 고기 특히 쇠고기가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믿음은 영국인, 그 중에서도 귀족들의 의식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쇠고기를 대량으로 섭취하는 것은 엄청난 힘과 [[남성]]다움을 획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 독립 전쟁]] 직전, 즉 영국의 군사력이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대륙에 손을 뻗치고 있었던 무렵 한 영국인은 이렇게 적었다. "고기를 맘껏 먹는 사람들이 좀 더 가벼운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 더 용감하다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 >때문에 [[귀족/영국|영국 귀족]]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호화로운 고기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개인의 재산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부유층에서는 그 음식 준비가 지위와 특권을 내세우는 기본적인 수단이었다. 영국에서는 '빈자들은 살기 위해 먹었지만, 부자들은 먹기 위해 살았다' 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귀족들 간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1283년 [[에드워드 2세]]는 '왕국의 저명 인사들이 자신들의 성에서 엄청난 양의 고기와 음식을 흥청망청 낭비하고, 그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그들을 흉내내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왕의 칙령은 만찬에서 고기 요리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었는데, 만찬 주최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준비한 요리에 따라 열렬한 지지자들을 끌어 모으는 능력을 크게 좌우한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상당히 중요한 결정이었다. > >고기는 각 군주의 만찬에 초대된 손님들의 적절한 지위와 신분을 명확히 구분해 주는 정치적, 사회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주빈석은 언제나 가장 윗사람에게 제공되었으며, 그 옆으로 지위를 따라 차례차례 자리가 정해졌다. 최고 부위의 고기는 가장 윗사람의 몫이었고, 질이 좀 떨어지는 부위는 아랫사람들 차지였다. 흔히 사용하는 '굴욕을 참다(eat humble pie)' 라는 표현도 실은 [[와신상담|'사슴 내장을 먹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근세 사회에서 사슴 내장이나 고기가 저급한 음식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사슴]]은 영주 소유인 사냥터에서만 잡을 수 있었으므로 평민들은 맛보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고, 오히려 희귀한 고급 식재료에 사까웠다. 유럽 귀족들은 크림으로 요리한 사슴 내장이나 사슴 고기 요리들을 별미로 높게 취급하며 소비하였다.][* 어찌됐든 옛날 영국에서 영주의 만찬에 초대 받을 정도면 (영주가 어느정도 지위를 가졌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영주의 가신 계급인 바바소르(vavasor) 정도는 돼야 했다. 평민들 기준이라면 영주에게 초대 받아 영주가 주는 음식을 먹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지배층들 사이에선 영주가 누구에게 어떤 음식을 배분했는지에 따라 알력다툼이 있었다.] > >영국의 봉건 군주들과 [[젠트리|지주 계급]]의 쇠고기 탐식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심지어 [[빅토리아 시대]] 후기까지도 귀족과 상류층 계급은 화려하게 차려진 고기 만찬을 즐겼다. 소설가 프리스틀리(J. B. Priestly)는 "[[로마 제국]] 이래 탐식에 빠져든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던 적은 없었다." 라고 말한다. 지주 계급의 농촌 주택에서는 매일같이 [[백정]], [[요리사]], 주류 관리인, 부엌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 성대한 사냥 파티, 만찬 준비, 화려한 음식물이 요란하게 펼쳐지곤 했었다. > >부자들은 쇠고기에 파묻혀 뒹굴다시피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19세기 말까지 사실상 쇠고기 중심의 식생활이 아닌, 즉 영국인들이 '백색 고기[* [[닭고기]], [[칠면조|칠면조 고기]], [[오리고기]]와 [[우유]], [[치즈]], [[버터]], [[크림]] 등 유제품]'라고 부르는 식품으로 대신해야 했다. 근대 초기에는 영국 도시에서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부류인 노동자 계급과 번창하는 유력한 [[부르주아]] 계급이 전면에 등장했다. 그들은 귀족들의 육식 생활을 갈망했다. > >[[산업 혁명|산업혁명]] 직전에 영국은 이미 세계적인 쇠고기 육식 생활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1726년 즈음 [[런던]] 시장에서만 해마다 10만 마리의 소들이 도살되었다. 당시 [[런던]] 주민들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일부 지역 주민들이 한 해 동안 소비하는 전체 쇠고기보다 더 많은 양의 질 좋은 쇠고기를 한 달 동안 먹어치웠다.' 18세기에는 적색 육류 중심의 식생활이 적군에 대한 결정적인 우위를 가져온다는 믿음을 갖고 영국 수병 1인당 1년 동안 무려 208파운드(1파운드=0.45킬로그램)의 쇠고기를 제공했다.[* 연간 약 93kg이므로 대략 하루에 250g 정도이다. 그러니까 고깃집에 가면 나오는 쇠고기 1인분보다 좀 더 많은 양을 1년 365일 내내 먹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저기에 나오는 급양 기준은 뼈와 부산물을 포함한 무게이므로 뻥튀기된 면이 좀 있고, 게다가 당시엔 보급 계통의 부패가 심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고기의 절반이 뼈에다 그나마 나머지도 오랫동안 조리하지 않으면 먹기 어려운 부위들이 대다수였다. 하여간 고기를 먹어야 강해지고 야채를 먹으면 약해진다는 이 믿음 때문에 [[영국 해군]]은 채소를 기피했고, 이로 인해 [[괴혈병]]이 유행했다는 설이 있다.] > >1798년 영국을 방문했던 한 [[스웨덴인]]의 글이다. "군주나 지배권을 가진 영국인들이 고기 없이 식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쇠고기 중심의 영국이 세계 최초로 쇠고기 상징 국가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초창기부터 '[[로스트 디너|로스트 비프]]'는 잘 먹는 [[귀족/영국|영국 귀족]]과 [[젠트리|중산층]]의 대명사가 되었다. > >쇠고기에 대한 영국인의 집착은 근대 초기에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식민지]] 정책의 방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영국 귀족, [[부르주아]] 계급, 군대에서 쇠고기 수요가 급증하자 영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야 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최초로 식민화된 목초지가 되었으며, 뒤이어 19세기에는 [[북아메리카]] 평원, [[아르헨티나]] [[팜파스]], [[호주|오스트레일리아]] 오지, [[뉴질랜드]] 초원이 똑같은 길을 걸었다. >----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시공사(2002), 66~69쪽 그레이트브리튼 섬은 고위도의 서늘하고 우중충한 해양성 기후로 인해 일부를 제외한 과채류 전반이 자라기 힘든 땅이다. 농업이 발전한 현재도 영국에서는 기후적인 이유로 인해 온실과 화석연료의 도움 없이는 [[토마토]]조차 제대로 기르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영국은 과채류 대부분을 남유럽에서 수입해오며, 모종의 이유로 공급망이 불안정해지면 영국인들은 채소를 먹을 수 없다. 당장 2023년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기름값이 오르고 전 세계적인 [[이상 고온]] 현상으로 인해 남유럽의 과채류 생산량이 급감하자, 영국 전역의 마트 매대에서는 토마토와 [[오이]]를 비롯한 생채소 전반이 말 그대로 증발해버렸다.[[https://m.mt.co.kr/renew/view.html?no=2023022817450179461&type=outlink&ref=https%3A%2F%2Fwww.google.com|#]] 하지만 동시에, 이 기후는 [[밀|주곡 농업]]과 [[축산업]]에 있어서는 축복받은 기후이기도 했다. 고른 강수량과 서늘한 기후는 밀 생산에 최적이었고, [[목장]]의 너른 목초지를 유지하기에도 좋았다. 영국의 높은 [[식량자급률]]은 이 두 부문에서 기인한다. 자연스럽게 영국에서는 밀과 유제품, 그리고 육류를 중심으로 한 식문화가 자리잡았다. [[양고기]] 또한 유명한 식재료인데, 영국인들은 어린 양(lamb) 고기와 늙은 양(mutton)을 철저히 구분하여 요리법을 체계화시켰으며, 근대 가축 품종 개량 기술의 발전 당시 가장 첫 대상으로 양을 품종 개량해 질 좋은 양고기를 생산했다. 또한 여러 가지 요리법으로 양고기의 단점인 누린내를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영국인]]들은 목초지에서 소와 함께 양의 사육도 활발히 했는데, 이렇게 개척된 지역들인 [[스코틀랜드]], [[웨일스]], [[호주]]와 [[뉴질랜드]]는 오늘날까지 드넓은 양 목장과 질 높은 양고기 생산으로 유명하다. 영국식 양고기 스튜는 오늘날 영국의 각 지역과 가문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정식이자, 영국계 이민자들이 세운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각 가정에서도 중요하게 만들어먹는 가정 요리 중 하나일 정도로 양고기에 대한 사랑도 크다. 이렇게 고기 매니아들이 넘쳐난 터라 이들은 고기를 2가지로 나눴는데, 이게 붉은 고기[* [[쇠고기]], [[돼지고기]]와 [[양고기]]]와 하얀 고기[* [[우유]], [[치즈]], [[버터]] 등의 유제품과 [[닭고기]], [[칠면조|칠면조 고기]], [[오리고기]]이다.] 중 값비싼 것은 역시 붉은 살코기이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닭고기]]도 고기색은 하얗지만, 오늘날의 고기보다 더 늙고 풍미와 색이 짙었다. 이러한 고기 사랑으로 인해 채소 요리는 기껏해야 [[샐러드]] 정도인 부실한 수준에 머물렀다. 이웃 국가인 프랑스 외에도 유럽 대륙의 대다수의 국가들도 영국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채소 요리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